레이 가와쿠보와는 1981년 파리 컬렉션에 초대 받은 최초의 외국 인 디자이너이다. 레 이 가와쿠보의 꼼므 데 가르송 작품들은 파리의 프레스들에게 `일본의 미학 정신`을 널리 알리는 최초의 교두보가 되었다. 파리에 온 그녀의 ‘콤므 데 갸르송 (남자처럼)’은 여성의 실루엣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면서 파리에 큰 충격을 주었다. 패션 평론가들이‘히로시마 시크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컬렉션에서 그녀는 두 가지 시도를 하였다. 하나는 당시까지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검정색을 색의 왕좌에 올려놓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구멍이 나고 뻣뻣한 울을 형태를 잡지 않고 사용하여 실루엣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신체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 후에 가와쿠보는 자신을 상징하는 상복 팔레트와 결별하였지만 여전히 성과 신체에 대해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찢어지고 구겨진 의복, 몸에 걸쳐진 검정 옷들…. 그녀의 컬렉션은 남녀 구별이 없고 도발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육체, 여성성, 의상 등에 대한 종래의 개념을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식 엘레 강스와는 전혀 다른, 옷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해체주의와 조형성을 심미안적인 의상으로 재해석한 레이 가와쿠보의 옷들은, 당시 서양의 전통적 의복 기준인, `신체에 맞아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하면서, 프랑스 패션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옷은 입는 다기 보다는 걸친다는 느낌을 준다. 새로운 소재와 커팅 기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파괴 패션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유럽에 일본 패션 붐을 일으켰다. 형식이란 틀에 얽매이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녀는 미완성의 헴 라인, 풀어헤쳐진 솔기, 복잡하게 얽힌 꿰매 붙이기, 특이한 주름 처리, 비대칭적인 것, 다양한 찢기와 소재 믹싱 등을 선보였는데 21세기를 맞는 동서양의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또한, 지극히 해체주의적이면서도 조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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